헴펠의 역설 (Hempel's Paradox)

머리말

이글에서는 헴펠의 역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헴펠의 역설에 따르면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명제를 ‘초록색 사과’가 입증합니다!! 진짜로요. 제대로 들으신 게 맞아요. ㅋㅋㅋㅋ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역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 가겠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역설paradox 중 하나가 제논의 역설Zeno’s Paradox, 그중에서도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역설입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역설에서 아킬레우스는 그보다 앞에서 출발한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킬레우스보다 0.9m 앞에서 출발한 거북이는 0.1m/s로 기어가고 아킬레우스는 1m/s로 뛰어갑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에 가는 동안에도 거북이는 앞으로 기어가고 있고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에 다다른 순간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 0.09m앞에 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이때 거북이의 위치로 뛰어가지만 그가 뛰어가는 동안에도 거북이는 0.009m 앞으로 기어갑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있던 곳에 다다를 때마다 거북이는 0.9m. 0.09m, 0.009m, 0.0009m, … 앞으로 가므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됩니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습니다.

이와 같이 “명백히 받아들일 만한 전제들로부터,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올바른 추론을 통해, 명백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에 다다른 논증”을 역설이라 합니다1. 이 포스트에서는 헴펠의 역설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박제철의 『딜레마의 형이상학』이영의 외의 『입증』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하였습니다.

헴펠의 역설 - 간단한 설명

헴펠의 역설Hempel’s Paradox 내지 까마귀 역설Raven Paradox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니코Nicod 조건: ‘모든 A는 B이다’라는 명제는 ‘A이고 B인’ 사례에 의해 입증되고 해당 사례를 입증 사례라 합니다. 반면 이 명제는 ‘A이고 B가 아닌’ 사례에 의해 반입증되고 해당 사례를 반입증 사례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A가 아닌’ 사례는 해당 명제와 무관하므로 무관한 사례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는 명제는 ‘검은색 까마귀’라는 관찰 사례에 의해 입증되지만, ‘하얀색 까마귀’라는 관찰 사례에 의해 반입증됩니다. 여기서 ‘빨간색 옷핀’은 무관한 사례이겠지요.
  • 동치equivalent 조건: 두 개 이상의 명제가 참인 경우가 같고 거짓인 경우가 같을 때 두 명제는 동치입니다. 가령 ‘A가 B이다’라는 명제는 ‘B가 아니면 A가 아니다’라는 명제와 대우 관계에 있고, 어떤 명제의 대우명제는 서로 동치관계입니다. 동치 조건이란 임의의 명제 $H_1, H_2$와 관찰 사례 $E$에 대해서, 만약 $E$가 $H_1$을 입증하고 또 $H_1$과 $H_2$가 논리적 동치일 때, $E$는 $H_2$를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두 조건 우리 상식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두 조건은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결론을 내놓습니다. 가설 $H_1$을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라고 합시다. $H_1$의 대우 명제를 $H_2$라 하면, $H_2$는 ‘까맣지 않으면 까마귀가 아니다’입니다. 니코 조건에 따르면 $H_1$은 ‘까맣고 까마귀인’ 사례에 의해 입증되고, $H_2$는 ‘까맣지 않고 까마귀가 아닌’ 사례에 의해 입증됩니다. 동치 조건에 따르면 $H_1$과 $H_2$ 각각은 서로의 대우명제로 논리적 동치이므로 $H_2$를 입증하는 사례가 $H_1$을 지지하고,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H_2$를 입증하는 사례가 $H_1$도 입증한다는 말은 $H_2$를 입증하는 ‘까맣지 않고 까마귀가 아닌’ 사례, 가령 초록색 거북이와 같은 관찰 사례가 $H_1$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결론이죠. 도대체 초록색 거북이, 빨간색 사과, 보라색 액자, 회색 바다 따위가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는 명제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동치 조건과 니코 조건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워 보이고, 그렇다고 도출된 결론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을 헴펠의 역설 또는 까마귀 역설이라 합니다.

이를 기호를 사용하여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헴펠의 역설 - 기호를 사용한 설명

먼저 논리학에서 사용하는 기호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기호와 용어 몇 가지2

  • 연언문: ‘AND’를 $\wedge$로 표기합니다. $A\wedge B$는 $A$와 $B$ 모두 참일 때에만 참입니다.
  • 선언문: ‘OR’를 $\lor$로 표시합니다. $A \lor B$는 $A$와 $B$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일 때 참입니다.
  • 부정문: 어떤 명제 $P$의 부정negation은 $\neg$으로 표기합니다. 즉,’$A$가 아니다’를 $\neg A$로 표기합니다.
  • 조건문: ‘만약 A이면 B이다’를 $A\rightarrow B$로 표기하고, 이때 $A$를 전건antecedent, $B$를 후건consequent이라 합니다.
  • 보편 양화 문장: ‘모든 x에 대해서’를 $\forall x$로 표기합니다. 예컨대 ‘x가 핑크색이다’를 $Px$라 표기하면, ‘모든 것은 핑크색이다’를 $\forall x (Px)$로 표기합니다.
  • 존재 양화 문장: ‘어떤 x가 존재한다’를 $\exists x$로 표기합니다. 예컨대, ‘x가 색을 가진다’를 $Cx$라 표기하면, ‘어떤 것은 색을 가진다’를 $\exists x (Cx)$로 표기합니다.
  • 동치 관계는 $\Leftrightarrow$로 표기합니다.

예시를 들어볼까요?

  • ‘모든 x에 대해, x가 P이면 x는 Q이다’는 $\forall x(Px \rightarrow Qx)$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임의의 대상 $a$가 속성 F와 G를 모두 가질 때, 이를 $(Fa\wedge Ga)$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x + 2 = y+ 7) \Leftrightarrow (x = y+5)$
  • ‘까마귀는 모두 검다’는 $\forall x(Rx \rightarrow Bx)$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까마귀인 속성을 $R$, 검은 속성을 $B$라 하면 말입니다.

이제 동치 조건과 니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니코 조건: 임의의 대상 $a$와 속성 $R$과 $B$에 대해 $(Ra\wedge Ba)$는 명제 ‘$\forall x(Rx\rightarrow Bx)$’를 입증합니다. 반면 $(Ra\wedge \neg Ba)$는 해당 명제에 대한 반입증 사례이고, $(\neg Ra \wedge ?)$는 해당 명제와 무관한 사례입니다.
  • 동치 조건: 임의의 명제 $H_1, H_2$, 그리고 $E$에 대해서, 만약 $E$가 $H_1$을 입증하고 또 $H_1$과 $H_2$가 논리적 동치일 때, $E$는 $H_2$를 입증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가설을 생각해봅시다. 까마귀 (Raven) 속성을 $R$로, 검은 (Black) 속성을 $B$로 둡시다. 이제 동치 관계에 있는 가설 $H_1$과 $H_2$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begin{align*}H_1&: \forall x(Rx\rightarrow Bx)\\H_2 &: \forall x(\neg Bx \rightarrow \neg Rx)\end{align*}\]

여기서 네 가지 증거 사례 $a, b, c, d$를 생각해봅시다:

\[\begin{align*}a&: Ra \wedge Ba\\ b&: Rb \wedge \neg Bb\\ c&: \neg Rc \wedge Bc\\ d&: \neg Rd \wedge \neg Bd\end{align*}\]

니코 조건에 따르면 증거 사례 $d: \neg Rd \wedge \neg Bd$는 $H_2$를 입증합니다. 이때 동치 조건에 따르면 $H_1$이 $H_2$와 동치이므로, 증거 사례 $d$는 $H_1$를 입증합니다. 증거 사례 $d$, 가령 하얀 책이나 초록 펜 같은 사례가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는 $H_1$을 입증한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가설 $H_3$를 봅시다3.

\[H_3: \forall x((Rx\lor\neg Rx)\rightarrow (\neg Rx \lor Bx))\]

$H_3$는 모든 $x$에 대해 $x$가 $R$ 속성과 $R$이 아닌 속성 중 적어도 하나를 가지면, 그것은 $R$이 아닌 속성과 $B$인 속성 중 적어도 하나를 가진다는 가설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난해하여 전혀 이해되지 않지만, 여기에 니코 기준과 동치 기준을 적용하면 또 신기한 결론이 나옵니다.

먼저 $H_1$과 $H_3$이 동치임을 보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전제가 사용됩니다:

  • 전제 1: ‘$A\rightarrow B$’와 ‘$\neg A \lor B$’는 동치입니다.
  • 전제 2: ‘$(A\lor \neg A)\rightarrow B$’와 ‘$B$’는 동치입니다.

전제 1은 참입니다. 왜냐고요? ‘$A\rightarrow B$’는 A이면서 B가 아닌 경우는 없다는 말인데, 이를 기호로 표현하면 ‘$\neg(A\wedge \neg B)$’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드모르간 법칙에 따르면, ‘$\neg(A\wedge \neg B)$’는 ‘$\neg A \lor B$’와 동치입니다. 그러므로 ‘$A\rightarrow B$’는 ‘$\neg A \lor B$’와 동치입니다.

전제 2도 참입니다. $(A\lor \neg A)$이 항상 참이므로 ‘$(A\lor \neg A)\rightarrow B$’가 참이기 위해서는 $B$가 참이어야 합니다. ‘$(A\lor \neg A)\rightarrow B$’의 참거짓 여부 ( 이하 진리값truth value)가 $B$의 진리값과 같다는 말이고, 이말은 즉, 둘이 동치라는 것입니다.

전제 2에 의해, $H_3: \forall x((Rx\lor\neg Rx)\rightarrow (\neg Rx \lor Bx))$는 $\forall x(\neg Rx \lor Bx)$와 동치입니다. 이어 전제 1에 의해, $\forall x(\neg Rx \lor Bx)$는 $H_1: \forall x(Rx\rightarrow Bx)$와 동치입니다. 그러므로 $H_3$는 $H_1$와 동치라는 것입니다.

이제 $H_3$에 니코 조건을 적용해봅시다. $H_3$의 전건은 무엇을 넣어도 참이므로, $H_3$을 입증하는 사례는 $H_3$의 후건인 ‘$(\neg Rx \lor Bx)$’만 만족하면 됩니다. 증거 사례 $c: \neg Rx \wedge Bx$는 해당 후건을 만족하므로, $H_3$의 입증 사례입니다. 그런데 $H_3$는 $H_1$과 동치이므로, 증거 $c$는 이제 $H_1$의 입증사례이기도 합니다. 즉, 검은 책, 검은 돌, 검은 풀 같은 사례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입증한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는 가설에 니코 조건과 동치 조건을 적용할 경우, 가설이 증거 사례 $a$ (까만 까마귀), $c$ (까만 책), $d$ (보라색 커피)에 의해 입증된다는 역설적인 결론이 도출됩니다.

꼬리말

매우 흥미롭지 않나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관찰 사례가 가설을 입증한다니. 언젠가 쓸 포스트에서는 헴펠의 역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관한 학자들의 여러 접근법과 입증이론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참고문헌

  • 박제철. (2018). 딜레마의 형이상학. 세창출판사.
  • 이영의, 최원배, 여영서, & 박일호. (2022). 입증. 서광사.
  1. 이영의 외 『입증』. p.67 

  2. 이영의 외 『입증』 p.57-58 

  3. 이영의 외 『입증』. p.6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