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6월까지 읽은 것들 정리해보았다. 5월 이후로 한국와서는 밀렸던 비문학 위주로 읽고 있는데 이외에 놀 것들이 많아서 좀 천천히 읽고 있다.
무더기 도서 리뷰 시리즈 (4/4)
2024년 읽은 책 결산 (상반기)
2024년 읽은 책 결산 (하반기)
“취업 안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돈 안 버는 편이 좋겠습니다“ (25년 1월~2월)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눈발 속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이 된 기분이야.” (25년 3월~6월) ←
예전에 읽었던 것부터 순서대로 살펴보았다.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내가 한 것. 상당히 좋아서 추천하고픈 작품은 제목을 형광펜으로 칠해두었다 :)
읽은 것들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 작가의 과학소설 단편집이다. 아래에서는 몇몇 단편을 살펴본다.
- 「0과 1사이」: 종종 사람들이 각자의 사고관 위에서 제 할말만 하는 모습을 본다. 나 스스로도 예외가 아니다. 「0과 1사이」는 자신의 시야에 갇힌 사람들의 풍경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살펴본다. 이책이 사회학 도서가 아니라 과학소설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김보영 작가는 종종 일상적인 풍경을 비틀어, 이야기가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세계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이것이 드러나는 과정은 자극적이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은근하게 흥미를 돋우며 끝에 가서 ‘으앗!’ 하게 만들고 난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이게 이런 말이었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0과 1사이」가 이러한 특징을 좀 보여준다는 점에서 추천!
그런데 학자들은 속도와 중력에 따른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공식을 만들어놓았으면서, 왜 시간과 나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공식을 만들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이 가장 느리게 흘러간다는 걸. 네 1년과 내 1년이 같지 않다는 걸…….
내가 1년을 하루처럼 보내는 동안 너는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데, 내가 겨우 하루만큼 성장하는 동안 너는 몇십 살쯤 나이를 먹고, 내가 몇 년은 살아야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며칠 안에 알게 된다고. 누구든 그 문제를 숫자와 기호를 섞은 공식으로 만들어 교과서에 써 넣었어야 했을 거야. 사람들은 숫자로 쓰지 않으면 믿지 않으니까.
그래야 어른들이 너희 시간을 그리 하찮게 여기지 않을 텐데. 너희가 어른이 되어 살아갈 고작 며칠의 시간을 위하여, 수백 년의 시간을 버리고 희생하라고 강요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조금은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로그스 갤러리, 종로」: 히어로물인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 「걷다, 서다, 돌아가다」: 시간을 ‘앎’과 연결시킨 부분이 인상깊었다. 재미있는 해석이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 느끼는 것은 단지 엔트로피의 증가며, 무질서의 증가다. 깨진 컵은 다시 붙지 않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이 우주에서 무질서는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기에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무질서가 느는 건 앎이 늘어나서다.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거리에 똑같이 생긴 나무가 쪽 고르게 정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무가 모두 다른 나무고, 다른 껍질, 다른 나이테, 무수히 다른 이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질서는 사라진다. 잘 모를 때엔 ‘외국인만 있다’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 풍경도, 그들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 다른 인종, 다른 신체와 다른 개인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질서는 사라진다. 그렇게 모든 개체가 독특해지면 세계는 온전히 무질서해지고 시간은 종말을 맞는다. 우주도 끝이 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앎이 멈추면 시간도 멎는다. 앎이 멈춘 사람의 시간은 멎으며 그 사람은 더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람마다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이다.
다들 어느 시기에선가는 멈춰 선다. 세상이 온전히 무질서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므로. 세상은 조금이라도 흑백으로 구분되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하므로. 그래야 삶을 견딜 수 있으므로. 그런 무질서의 끝에서는 생각마저도 종말을 맞으므로.
더해서 앎이 사라지면 시간도 되감긴다. 어린 날로, 과거로. 점점 뒤로.
- 「얼마나 닮았는가」: 1~2월 리뷰글에서 살펴보았듯, 표제작 「얼마나 닮았는가」는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에 먼저 실린 작품이다. 다시 읽어도 굉장히 강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이야기했으니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다섯번째 감각
김보영의 『다섯번째 감각』: 역시 김보영의 단편소설집이다. 넘 재미있게 읽음! 아래에서는 작품 몇편을 살펴보았다.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제목만 읽어도 궁금하지 않나요?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어떻게 당연하지 않게 되는지 읽어보시라.
- 「땅 밑에」: ‘하강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표면을 파고 지하로 내려간다. 이들은 땅 아래로 왜 내려가는 것일까? 아래에 무엇이 있기는 할까?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고 읽으며 다다른 이야기의 결말이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끝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압도감과 경이감이 나에게도 전해지더라.
마지막 문장, 스포일러일 수도? (더 보려면 클릭)
가능한 한 지상과 가까운 곳까지 올라가 메시지를 남길 것이다. 언젠가 나를 뒤따라 내려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 이전에 내려왔던 하강자가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 처럼.
— 내려가라.
라고.
땅 밑에, '모든 것'이, '만물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있다고. - 「다섯 번째 감각」: 표제작인만큼 이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 장치 자체는 다른 소설에서도 쓰여온 것인데 읽는 도중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에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배경이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는 데에서 오는 놀라움과 신비로움이 과학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인 것 같다.
- 「우수한 유전자」: 얘도 되게 흥미로웠다. 다른 블로그들 보니 이야기의 전모가 뻔하지 않냐는 글이 좀 있었다. 사실 제목도 그렇고 반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긴 한데도 나는 읽고 나서야 ‘아앗!’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되더라.
- 「거울애」: 소재가 되게 재미있었다. 저런 질병이 실재한다면 어떤 메커니즘으로 저런 표현형이 나오는 것일지 그럴듯한 설정을 지어보고 싶다.
- 「노인과 소년」: 약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랑 비슷한 분위기…
- 「몽중몽」: 진짜 몽중몽중몽중몽중몽중몽중몽중몽중몽…
기파
박해울의 『기파』: 2018년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이라고 한다. 막 엄청 재미있지는 않았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구의 증명
최진영의 『구의 증명』: 많이 들어는 봤는데 미루다가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다. ‘담’이 죽은 애인 ‘구’의 몸을 먹는다는 독특한 소재로 잘 알려져 있는 듯하다. ‘소니 빈’이라는 식인종 가족의 가장이 있다. ‘소니 빈’ 이야기에서 그의 가족은 그들보다 약한 자들을 살해하여 먹었는데, 그런 일이 구와 담이 살고 있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체감한다. 현대 사회에서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가 그의 강함을 나타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 것으로 간주된다. 구와 담은 그렇게 살지 말자고, 적어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러한 삶의 방식을 전하지 않자고 다짐한다.
구가 말한다.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거야”. 담은 생각한다. ‘네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어. 병들어 죽거나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네손에 죽는 게 훨씬 좋을거야.”
그러던 구가 돈과 폭력으로 인해 길바닥에서 죽었다. 담은 질문한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담이 구의 몸을 먹는 것이 납득되는 측면이 있어 약간 힘들었고, 읽으면서 약간 울컥하거나 기억에 남는 문장이 여럿 있었다.
이모 몸을 태우는데, 이모의 몸이 그렇게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 고통에 시달리다 죽은 이모의 몸을 다시 불 속에 밀어넣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모의 몸과 같이 살고 싶었다. 영혼이 없으면 어떤가. 몸이 내 옆에 있는데. 몸이 거기 있으면 분명 다 듣고 보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졌어. 내가 진 거지. 내가 진 거야. 화장하는 내내 홀로 중얼거렸다. 여명에 기댄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생각났다. 어린 날 새벽에 잠깐 깨었을 때 보았던 꿈같은 기억이었다. 그때 밖은 파랗고 할아버지의 몸은 검었다. 파랗고 검은 것은 외롭다. 외로운 색이다. 어느 새벽에, 아픈 이모가 꼭 할아버지처럼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잠결에 그 장면을 보고 엉엉 울었다. 이모도 가겠구나. 할아버지처럼 가겠구나. 내 안에서 그런 소리가 왕왕 울렸다. 느닷없이 통곡하는 나를 보고도 이모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내 등을 가만히 쓸어주며 중얼거렸다. 괜찮다, 아가야, 다 지나간다. 다 지나갈 거야.
근데 그런 걸 지나간다고 말할 수 있나, 이모. 지나가지 못하고 고이는데. 고유하게 거기 고여 있는데.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 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사람은 수술을 하고 약을 먹어서 죽음을 미룰 수있다. 불을 다루고 요리해서 먹는다. 불을 다루기 전에는 생고기 생풀을 그냥 먹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동족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면. 배만 부르면. 허기 때문이 아니라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손이 탐나서. 그의 발이 탐나서. 그의 머리, 그의 얼굴, 그의 성기가 탐나서.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의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불과 도구 없이도, 다리와 턱뼈와 이빨만으로.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사랑과 결함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 예소연 작가의 단편집이다. 「그 개와 혁명」, 「내가 머물던 자리」 두 작품을 잘 읽었다. 아래에서는 수록된 몇편을 살펴보았다.
- 「우리 철봉하자」: 여름밤 느낌나는 이야기. 인디영화 〈철봉하자, 우리〉로도 나왔다고 한다.
-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주인공 희조가 각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기를 보내면서 마주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동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연못에 버리고 느꼈던 그 감정은 혐오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게 아주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무너질 거라는 공포. 애들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리기에 무르디무른 무언가를 내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
- 「팜」: 이 장면 좀 웃겼다.
“해나는 남자친구 있니?” 고모가 물었다. 대진이 대신 대답했다. “내가 해나 시집보내려고 돈 버는 거야.” “나 비혼주의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대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해나도 질세라 받아쳤다. “아빠야말로 함부로 말하지 마.” 참다못한 대진이 젓가락을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힘 조절이 안 돼 젓가락 한 짝이 퉁 튀어올라 밥상 한가운데 자리한 산적 틈에 파 묻혔다. 생전 할아버지가 고기를 좋아했다며 늘 가운데 올려놓는 음식이었다. 홍동백서 같은 건 아무도 몰랐기에 그렇게 했다. 대진이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뭘 모르나본데. 주의니 뭐니 그딴 말 붙이면서 잘난 척하는 인간들, 다 저열한 인간들이야.” 샤머니즘의 현장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 「그 개와 혁명」: 아버지 (태수씨(氏))가 돌아가신 후 수진은 태수씨가 수첩에 적어놓은 이런저런 유언을 이행한다. 그중하나가 장례식장에 키우던 개 ‘유자’를 데려오는 것. 장례식장은 난장판이 된다. 태수씨는 도대체 왜 자신의 장례식에 개를 데려오라고 한걸까? 궁금하면 읽어보세요!
장례식장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유자는 장례식장 곳곳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느라 바빴고 벽에다가는 오줌을 누었다. 직원들이 유자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쉬이 잡히지 않았다. 유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고 나는 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엄마가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니들 진짜 미쳤니?”
나는 수첩을 들어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을 찾았다. 그리고 해오던 것과 같이 최대한 태수씨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 「내가 머물던 자리」:
정선이가 내게 속삭였다. 시연아, 손은 내 아이가 아니야. 누군가 낳았지만, 스스로 나를, 이곳을 선택했어. 그리고 나 진짜 그냥 배 나온 거야. 잘 먹고 잘 살아서. 우리는 외따로 태어나서 홀로 자신을 길러낸 사람들이고 지금은 함께 살고 있어.
급류
정대건의 『급류』: 고등학생 해솔과 도담은 사귀는 사이이다. 어느날 해솔의 어머니와 도담의 아버지가 강물에서 나체로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해솔과 도담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주 꽁꽁 응어리진 감정들이 슬슬 녹아 나오는 느낌이고 관계가 풀리는 것이 너무 오래걸려 정신적으로 지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해솔과 도담이 심리치료를 받아보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모우어
천선란의 『모우어』: 천선란 작가의 과학소설 단편집이다. 인상깊은 작품들이 많았다. 추천!!
- 「모우어」: 인류는 더이상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지 않는다. 소리에 의미를 담지 않는다. 인류는 ‘의음’과 감정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도록 진화하였고 이들 사회에서 언어는 금기시된다. 세계관이 재미있었고 언어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의견들도 흥미로웠다.
언어를 취하면 우리가 얻게 된 모든 감각이 죽어. 언어는 감각을 납작하게 만들어. 사고와 판단이 형태에 묶이지. (…) 초우, 현혹되지 마. 실패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 인류의 진화와 발전을 자세히 들여다봐. 언어가 정착되고, 그리하여 많은 것이 정립되고, 끊임없이 전달되면서 세상은 전쟁과 빈곤, 파괴와 몰살, 멸종의 길을 걸었어. 시야는 좁아지고 감각은 둔해졌지. 언어에 지배당한 인류의 끝은 자멸이었다. 우리의 뇌는 언어를 탈락시키며 발전했어. 언어가 통제했던, 최초의 인류가 가졌던 감각을 다시 깨웠다. 우리의 소리는 언어에 정복되지 않기 위한 저항이다. 언어가 생겨나고 규칙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하는 몸짓이지. 지켜라.
이책을 읽는 전후로 사회구성주의에 관한 글을 읽어서 그랬었는지 언어에 대한 뭄의 설명이 다소 익숙했다. 언어는 본질1상 우리 인식 바깥세계의 사물을 구별하고 구분짓는다. 게다가 언어는 애매하고 (=다의적이고) 모호하다 (=경계가 흐릿하다). 이러한 특징은 언어로 하여금 그 지칭 대상이 되는 사물이 ‘존재하는 그대로’ 반영되지 못하도록 한다. “언어는 감각을 납작하게 만들어. 사고와 판단이 형태에 묶이지”라는 뭄의 말이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 같다.
언어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이들 인류로 하여금 언어 대신 의음을 소통의 형태 내지 사고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한다. 추정컨대 의음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가 인식 바깥세계의 사물을 구별하고 구분짓지 않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언어가 외부 사물을 구분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와 개념들도 외부 사물을 구분지을 것만 같은데, 이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는다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당히 마음에 들고 궁금해지는 상상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언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2. 아래에서는 언어, 개념, 의미를 섞어 사용하였다는 점을 양해바란다. 블루어D. Bloor와 반즈B. Barnes는 언어가 우리 인식 밖에 있는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여 지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보다 언어 사용자들이 다양한 사례를 접하며 개별 사례를 어떤 개념을 통해 지시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과정을 통해 그 개념의 의미가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 인식 밖의 사물이 가진 속성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므로 ‘$a$, $b$, $c$라는 속성을 가지면 이건 $X$야’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다. 다양한 사례 $\alpha, \beta, \gamma \ldots$를 접하면서 ‘$a, b, c,$라는 속성을 가지면 이걸 $X$라고 하자. 그런데 $\delta$와 같은 사례를 보면, 무언가 $X$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d$라는 속성도 가져야 할 것 같아’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언어라는 말이다.
나아가 반즈는 ‘동전’의 예시를 들어, 어떤 것을 ‘동전’이라 지시하는데에는 감각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짚어낸다. 어떤 사물이 공인된 조폐국에서 주조되었고 직경 2cm에 두께 1mm인 원형 금속이라는 속성을 가진다고 하자. 이들 속성들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물이 곧바로 동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사물을 보고 우리가 집단적으로 ‘동전’이라고 말할 때 그 사물은 동전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개념과 언어가 생성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지, 생성된 개념으로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과는 별개가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 ‘생성된 개념’이란 것은 없다. 어떤 언어와 개념이 지시하는 “사례들은 열려있는 집합을 구성”2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언제나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의 완결된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뭄은 언어의 긍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다. 언어는 그 본질상 사물이 존재하는 그대로를 반영하지 않으며 인식 외부의 사물을 재단하여 “언어가 시야를 좁히고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언어의 내용을 바꾸고 규정할 수 있다. 언어는 열려있고 결코 정착되지 않는다. 생성·소멸·변화될 수 있는 언어가 오직 특정한 시점에 취하는 잠정적인 모습을 통해서야말로 우리가 현상을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언어는 우리의 감각을 제한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도와주며, 우리를 통제하는 한편 우리에 의해 통제된다.
당연히! 뭄에게는 위의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의음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유의미하게 감각할 수 있으면서도 그 온전성을 놓치지 않는다면 언어를 쓸 이유가 없으니까. 종종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적 생명체를 다루는 이야기들을 읽게 된다. 인간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언어를 벗어난 사고가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하기 어려워서 답답하다. 근데 또 그런 소재 굉장히 흥미롭고 짱 재밌다. 올해 읽었던 것 중에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공생 가설」이 비슷한 소재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뼈의 기록」: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봇 로비스가 청소부 모미와 사별하는 방식을 그려낸 이야기. 인간이 아닌 로비스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해보려는 일련의 시도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작가가 마감 직전 5시간만에 써냈다는데 (경악) 그만큼 특유의 분위기와 흐름이 한 호흡에 담겨 굉장히 잘 읽히니 꼭 읽어보시라!
종의 기원담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무기생물체인 지성체 로봇이 문명을 구축하고 사회를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등장인물 전원이 로봇이다. 로봇사회에서 이들이 질문을 던지고 연구하는 모습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소설의 세계관이 미래에 있을법한 이야기라서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로봇과 인간의 공존에 관해서도 다루니 관심있으면 꼭 꼭 꼭 읽어보세요!!!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이 로봇 규범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같이 인간을 절대적 위치에 두는 명령이 여느 규칙이 그렇듯 법문언 해석의 문제에 놓인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칼스트롭 연구소에서 인간의 명령이 로봇의 절대적인 규범이 되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만, 여기에는 복잡한 점이 있다.
언어는 다층적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맥락에 따라, 청자의 문화와 지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해석된다. 언어를 다른 언어체계로 번역하기라도 하면 다시 속뜻이 크게 변한다.
언어는 개념의 미욱한 상징체계에 불과하다. 또한 언어는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질 수 있으며, ‘절대성’은 어러 명령에 동등하게 놓일 수 없다.
인간의 발화를 분석하고, 명령의 범주를 한정하고 해석하는 체계가 다시 직원 사이에서 생겨났을 것이며, 그 과정은 법학의 발전 과정과 유사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인간의 명령은 법전보다 체계가 없었을 것이므로, 그 해석은 훨씬 더 주관적이었을 것이다. 그 해석을 주도하는 로봇에게 새로운 권위가 부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작품에서는 인간이 로봇을 만들었고 로봇이 본능상 인간을 거스를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 중 하나가 ‘만약 인간이 또 다른 지성체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이 본능상 그 지성체를 거스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에 관한 것이다. 물론 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궁금해서… 난 ‘인간이 본능상 그 지성체를 거스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의 허점을 파고들면서 해킹하려는 쪽을 지지할 것 같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금요일엔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올해가 세월호 참사 11주년이다. 아직도 그 뉴스를 들었을 때 뭘 하고 있었는지가 기억난다. 그 당시의 기억은 모두가 잊기 어려울 것이다.
올해 한국 날짜로 4월 16일은 다른 지역 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날이었는데, 아침에 리디북스에서 이책을 416일동안 무료대여를 한다고 들어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항에서 transit center까지 오는 버스와 transit center에서 학교까지 오는 버스에서 읽었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너무 읽기 힘들었음.
이책과 더불어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4·16 세월호 참사 종합보고서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희랍어 시간
한강의 『희랍어 시간』: 시력을 거의 잃은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은 수강생이 등장한다. 사용된 표현들이 시적이었고 편지를 통해 이야기가 풀리는 형식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홍학의 자리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 어느 날 학생 다현의 시체가 호수에서 떠오른다. 학교 선생님인 준후가 다현의 시체를 호수에 유기한 것은 맞지만 그가 다현을 살해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어떻게 된 일일지 궁금하면 읽어보세요.
사망 시점과 시체 처리에 관한 트릭은 상당히 좋았다. 어떻게 알리바이를 짰을까 생각하며 읽다가 전말이 드러났을 때 ‘앗 이런 방법이?!’싶었다.
한편 끝에 나오는 다현에 관한 반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긴 하지만 스토리에 긴밀히 연결된다거나 중요하게 사용되었다는 보여지지 않았다. 반전이 이야기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였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당 소재가 이렇게 사용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학생-교사 관계라는 소재가 불쾌할 수 있다는 평은 이해가 된다. 다만 관련 묘사가 길지는 않아서 읽는데 많이 신경쓰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초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준후의 품성이 더욱 드러나면서 욕하면서 읽게된다. 학식당에서 저녁먹으면서 앉은 자리에서 :( 하고 0_0하면서 한숨에 읽었다. 한번 읽어볼만하다.
7인의 집행관
김보영의 『7인의 집행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 흑영은 7인의 집행관에 의하여 일곱 번 사형을 집행당한다. 근데 차례를 보면 제7집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10집행에서 끝나길래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읽는 내내 영화처럼 머릿속에 매 장면이 그려지는 소설이었고 영상화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나의 이해와 정반대되는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데도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특히 제8집행에서 인격이 뒤바뀌는 부분은 정말 짜릿하고 소름돋았다.
초중반 읽는동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면 배경이 드러나니 너무 부담가지지 않고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조예은의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제목만 봐도 궁금하지 않나요. 제목 그대로 뉴서울파크라는 놀이공원에서 젤리장수에 의해 벌어지는 대학살 이야기다. 챕터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군상극이고, 이들 이야기가 얽히면서 사건의 배경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런데 사건의 전말이나 흑막의 정체가 중요한 성격의 소설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건에 얽힌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며 무엇을 느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좋았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성해나의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건축학을 전공하는 재서는 깐깐하고 고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문 교수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그의 권유로 서머스쿨에 가게된다. 무려 초소수정예 2인 서머스쿨이었는데, 이본이라는 다른 학생과 함께 경주에서 살면서 고택을 개축하는 설계 과제를 맡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따뜻하고 좋았다!
파과
구병모의 『파과』: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 하도 선전을 많이 하길래 궁금해서 읽어봤다.. 영화로 리메이크된 모양.
2025년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런 상은 어디서 주는 걸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젊은작가상은 문학동네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인데, 등단한지 십 년 이내의 신인 작가들의 이전 해 각종 매체에 투고한 중·단편 소설에 준다고 한다.
- 백온유, 「반의반의 반」: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 할머니의 판단에 이해가는 지점이 있다.
- 강보라, 「바우어의 정원」: 드라마 치료 대화법으로 주고받으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추위에 굳어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눈발 속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이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영원히 멈춰버린 분수대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 켜진 가로등이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물속에 가라앉은 못생긴 가오리가 된 기분이야.”
“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선배랑 가오리찜에 소주한잔하고 싶지 말입니다?”
그게 뭐야.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쏟아냈다.즉 이 소설은 ‘아픔을 팔아넘기는 것’과 ‘아픔 속에서 생존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쓰였고, 그 길을 보여주기 위해 트라우마의 정원에서 이토록 세련되게 뒹군다. (전청림의 해설 「마이즈너식 기품」 中)
-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촬영 현장에서 비윤리적인 행위를 한 감독 팬클럽 이야기. 주인공의 마음이 납득은 된다….
성해나의 소설은 (심사평에서 이런 표현이 양해된다면) 좀 ‘돌아’ 있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정말 그렇다. 돌아 있다는 것은 논리나 상식을 벗어난 무모한 에너지와 집착어린 광기가 은은하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그 광기에 가까운 덕질 현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작가와 주제가 잘 만났다는 인상이었다. (…) 물론 이 소설은 덕질의 모럴이 광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이 전소되어도 남는 찜찜함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광기야말로 그 찜찜함을 직시하는 가장 정직한 눈인지도 모르겠다. (인아영의 심사평 中)
- 성혜령, 「원경」: 이야기 특유의 분위기가 되게 괜찮았다.
- 이희주, 「최애의 아이」: 동명의 만화도 앞부분 잠깐 봤었어서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던 작품. 그런데 진짜 최애의 아이를 가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ㅋㅋㅋ 흥미롭게 읽었다.
현대사상 입문
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 입문』: 포스트구조주의 입문서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뭔지 잘 모르는 나에게 딱 맞는 책이었다. 이책에서는 데리다, 들뢰즈 등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를 어렵지 않게 소개하여 이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간단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정말 이름만 들어본 상태에서 읽었는데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 않아 좋았다.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다. 두 항의 우열관계가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 두 항이 상호의존적일 수 있다는 인식의 틀인 것이다. 몇가지 정리해보았다.
- 데리다는 개념 수준에서 이항의 탈구축을 주장한다. 특히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라는 이항대립의 탈구축을 제시한다. 원본과 복사본,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 입말 (파롤)과 글말 (에크리튀르)라는 이항이 있다. 기존의 사상이 전자와 후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며 전자가 후자보다 좋은 것, 나은 것이라 보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적 시각에 반대한다.
- 들뢰즈는 존재 수준에서 이항의 탈구축을 주장한다. 보통 ‘차이’는 하나의 동일성이 확보 및 고정된 $A$라는 존재자와 하나의 동일성이 확보 및 고정된 $B$라는 존재자가 다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차이는 이미 고정된 동일성 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반면 들뢰즈는 $A$라는 동일성과 $B$라는 동일성이 $A$와 $B$의 다름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A$와 $B$ 각각은 여러 관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그 형태를 취하는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 $A$와 $B$의 동일성이 고정되기 이전부터 각각은 다른 존재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존재자들은 복잡다단하게 얽힌 관계를 맺으며 ‘버추얼’하게 존재하며,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 푸코는 권력에 관한 기존의 이분법의 탈구축을 주장한다. 기존에 권력은 지배자-피지배자가 명확히 나누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푸코는 근대 이후 권력은 지배자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따라서 지배자가 자신의 의지를 피지배자에게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권력은 생산 기구, 가족, 집단, 제도 속에서 형성되고 작동하는 복수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지배자가 없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학교, 군대, 병원, 가족 등 근대의 제도와 집단 속에서 ‘규율 훈련 (discipline)’을 통해 특정한 사고관을 내재화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권력이 작용할 수 있다.
-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사변적 실재론은 “인간에 의한 의미 부여와는 관계없이, 그저 단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 쪽으로 향한다는 방향”을 말한다. 인간의 감각과 해석 이전에 이미 사물은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이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딱 보고 (=일응적으로, prima facie) 말할 수 있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이것이 올바른 의미다”라고 확정할 수 없고, 관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결정불가능성과 상대성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렇게 단적으로 말하기에는 존재자는 복잡하고 다의적이라는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를 비판한다. 메이야수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이 세계는 우연히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세계는 언제든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저 우연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중간에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라캉, 르장드르에 관한 간략한 소개 나오는데 나같은 입문자도 이해할 수 있게 되게 간추려 소개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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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서 ‘본질essence‘은 ‘어떤 존재자를 바로 그 존재자로 만드는 속성’을 의미한다. 어떤 것을 바로 그것으로 만드는 속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